아이카와 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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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카와 료지는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로, 포수로서 1994년부터 2017년까지 23년간 활약했다.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었으며,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일본 국가대표로 동메달을 획득하고,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우승했다. 2007년에는 올스타전에 처음 출전했으며, 타율 0.302를 기록했다. 2017년 현역 은퇴 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배터리 코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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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카와 료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선수 정보 | |
이름 | 아이카와 료지 |
로마자 표기 | Aikawa Ryōji |
출생일 | 1976년 7월 11일 |
출생지 | 지바현 이치카와시 |
신장 | 183cm |
체중 | 88kg |
포지션 | 포수 / 코치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프로 입단 | 1994년 (드래프트 5순위) |
첫 출장 | 1999년 8월 21일 |
최종 출장 | 2017년 10월 3일 (은퇴 경기) |
등번호 | 80 |
선수 경력 | |
소속팀 |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1995–2008)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2009–2014)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5–2017) |
코치 경력 |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9–2021)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2022–현재) |
역할 |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배터리 코치 (2019-2021)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디펜스 치프 겸 야수 코치 (2022-현재) |
국가대표 경력 | |
대표팀 | 일본 |
올림픽 | 2004년 |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2006년, 2013년 |
메달 |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 금메달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 동메달 |
NPB 기록 | |
타율 | 0.260 |
홈런 | 69 |
안타 | 1150 |
기타 정보 | |
참고 자료 | Baseball Reference Sports Spectrum Gig Management Japan |
2. 프로 선수 경력
아이카와 료지는 5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거쳐 199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부터 5순위로 지명받아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9] 프로 입단 초기에는 주로 2군에서 뛰었지만, 1999년에 1군으로 승격되어 첫 안타를 기록했다.[10]
요코하마시절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 발탁되어 우승을 경험했고, 선수 회장을 맡았다. 2008년에는 해외 FA권을 획득하여 메이저 리그 진출을 시도했지만, 결국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했다.[23][24]
야쿠르트에서는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팀의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에 기여했다. 2014년 시즌 후에는 FA를 통해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36]
2. 1. 프로 입단 전
형의 영향으로 5살 때부터 야구를 시작하여 초등학교 2학년 때 이치카와 리틀 리그에서 활약했고, 중학교 시절에는 투수를, 도쿄가쿠칸 고등학교 입학 후에는 외야수로 뛰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사회인 야구팀 감독의 권유로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포수로 전향하여, 3학년 때부터는 1번 타자 겸 포수로 활약했다.[5] 이때 팀 동료로는 G.G. 사토가 있었다.[6] 1학년 후배로는 훗날 프로에서도 팀 동료가 되는 이시이 히로토시가 있었고, 배터리도 구성했다.[7]고교 시절 통산 152개의 안타를 기록했고, 여름에 열린 지바현 야구 대회에서 팀은 8강에 진출했다. 아이카와 본인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을 기록하는 등 포수로서의 경험은 4개월 정도로 부족했다. 고교 졸업 후 199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부터 5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했다. 다무라 히토시와 후쿠모리 가즈오는 입단 동기이며 등번호는 '''59'''번 이었다. 담당 스카우트는 마츠오카 코스케였다.[9][8]
2. 2.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 시절
1994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부터 5순위로 지명받아 입단했다. 입단 후 2군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다가, 5년 후인 1999년 8월 21일에 1군으로 본격 합류하면서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 출전, 이후 9월 3일의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1군 데뷔 후 첫 안타를 기록했다.[10] 포수로서의 경험이 얕은 채로 프로에 입단했기 때문에 츠지 야스히코, 코야마 아키하루, 쵸시 토시오 등 3명의 육성 담당 코치가 아이카와에게 밀착하여 포수에게 필요한 작법과 기술을 처음부터 배웠다.[11] 2군에서 외야를 지키는 경우도 있었다.[10]2000년에는 당시 팀의 주전 포수인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전력에서 이탈하고 있던 8월 25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 상대 투수인 구와타 마스미로부터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는 등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13] 당시 곤도 히로시 감독으로부터 "타자를 막기 위해 어쨌든 생각하라", "계속해서 공격하라"는 가르침을 받아 공격적인 리드로 10승 4패로 팀을 이끌었다.[12]
모리 마사아키 감독이 취임한 2001년에는 주로 대타로서 출전하였지만 그 해 5월 3일에는 아이카와의 고교 1년 후배인 야쿠르트의 이시이 히로토시로부터 첫 홈런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한 번은 등번호가 25번으로 변경되는 것이 결정되면서 “변경한다면 한 자릿수”라는 아이카와 본인의 강한 희망으로 25번이라고 쓰여진 유니폼을 입는 일도 없이 59번으로 돌아왔다.

2002년에는 다니시게가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하면서 주전 포수 후보로 기대되었지만, 갑작스런 다리 부상 때문에 주춤거리는 등 이후 주니치에서 요코하마로 입단한 나카무라 다케시가 주전 포수로 낙점되기도 했다. 포수로서도 자신감을 잃고 밑바닥까지 떨어진 해라고 나중에 당시를 회상했다.[14]
2003년은 나카지마 사토시의 합류로 개막부터 얼마 동안 나카지마와 나카무라의 병용이 이어져 출전 기회를 놓쳤지만, 도루 저지율.457을 기록하는 등 존재감을 드러내 점차 두각을 나타냈고, 시즌 후반에는 선발 마스크를 맡게 되었다. 이 해부터 배터리 코치로 취임한 후쿠다 이사오의 기초부터의 철저한 지도 덕분에 자신감을 되찾고 기술을 익혀 리드에 성장을 가져왔다.[15]
2004년부터는 등번호를 전 주전 포수 타니시게도 달았던 '''8'''로 변경했다. 홈 개막 카드인 한신전에서는 4월 6일에 2점 홈런을 날리고, 7일에는 4안타 7타점, 8일에는 결승타가 되는 2타점을 올려, 아이카와의 활약으로 전년도 팀이 약했던 한신을 상대로 3연승을 거두었다.[16] 아테네 올림픽에서 귀국한 후에는 타격이 좋았고, 9월 23일 요미우리전에서 3점 뒤진 9회에 키사라기 히로시로부터 극적인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17] 올림픽 출전으로 1개월 팀을 떠났지만, 처음으로 100경기 이상(102경기) 출전하여 주전 포수 자리를 잡았다.[18]
2005년은 자기 최다인 144경기 출장을 기록한다. 야쿠르트와 3위를 다투던 9월 19일에는 요미우리전에서 2년 연속 끝내기 적시타를 쳐 승리했고, 팀의 4년 만의 A클래스 진입에도 기여했다.[19] 전년도까지 투수력이 붕괴된 상태였던 투수진도 안정되어 팀 평균자책점도 리그 2위가 되는 등 투수진을 이끌며 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2006년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 멤버로 선발되어 우승을 경험했지만, 페넌트 레이스에서는 팀은 부상자가 속출하며 부진했다. 아이카와도 여름철 부상의 영향으로 119경기 출전에 그쳐 규정 타석에 간신히 도달하지 못했다. 이 해부터 2008년까지 요코하마의 선수 회장을 3년간 맡아 팀을 이끄는 입장이 되었다.[20]
2007년은 개막부터 능숙한 타격력으로 고타율을 유지한다. 프로 13년 만에 올스타전에 첫 출장했다. 시즌 막바지 규정 타석에 도달시키기 위해 2번 타자로 선발 출장하기도 하여 처음으로 타율 3할 대를 기록했다. 오른쪽 어깨 부상으로 인해 도루 저지율은 .250으로 부진했지만, 공수 모두 팀에도 타 구단에도 강한 존재감을 보였다. 베이징 올림픽 대표 후보 선출에서는 어깨 부상이 고려되어 호시노 센이치 감독도 아이카와의 소집을 보류하려 했지만, 수술을 연기하고 대표팀 합류를 열망하여 간신히 대표팀의 합동 자율 훈련에 참가했다. 시즌 종료 후, 아팠던 오른쪽 어깨 관절순 수술을 받았다. 계약 갱신에서 구단의 제시액에 불만을 품었지만, 같은 시기에 개최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예상을 훨씬 웃도는 여성 팬들이 모여, 그 인기로 인해 존재감을 재확인한 구단 간부가 생각을 바꾸어 추정 연봉 1억엔의 대열에 올라, "꽃미남 평가"로 화제가 되었다.[21]
2008년은 수술 후유증과 부상으로 경기에 결장하는 일도 많았고, 팀 성적의 부진으로 인해 젊은 포수에게 출전 기회를 양보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병인 허리 통증의 재발도 있어 101경기 출전에 그쳐 규정 타석에 미치지 못하고 타율 .255에 머물렀다. 이 해, 해외 FA권을 획득했고, 구단은 아이카와에게 복수년 계약도 준비해 잔류를 설득했지만,[22]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며 권리를 행사하고 앨런 니어로를 대리인으로 하여 메이저 리그 도전을 목표로 했다.[23] 요코하마는 국내의 다른 구단과의 교섭을 단념한 후 잔류는 인정하는 방침이었지만, 메이저 교섭 끝에 잔류를 인정하지 않아 아이카와의 퇴단이 결정되었다.[24]
2. 3.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2009년 시즌 개막 이후부터 주전 포수로 기용되었고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팀이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경쟁을 펼치던 9월 28일에는 왼쪽 옆구리 근육 통증으로 1군 등록이 말소되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는 부상을 안고 출전했지만 팀은 패했다. 이적 첫 해 시즌 성적은 타율 2할 4푼 7리, 5홈런, 43타점을 기록했다.팀의 주전 포수 자리를 유지하며 개막 초반에는 타격 부진을 겪었으나, 점차 타격감을 회복했다. 타율이 2할 대에서 5월에는 3할 대로 상승했고, 주로 6번 타자로 뛰며 하위 타선에서 활약했다. 최종적으로 타율 2할 9푼 3리를 기록했고, 6월 4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전부터 6월 6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까지 개인 통산 처음으로 3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하며 개인 최다 기록인 11홈런과 65타점을 달성했다.
2011년 4월 하순부터 팀은 선두를 달렸지만, 여름 이후 부상자가 속출하며 어려움을 겪었다. 아이카와 자신도 8월 26일 한신전에서 오른손에 공을 맞아 부상을 입고 출전을 보류했지만, 대신 포수 마스크를 썼던 가와모토 료헤이도 경기 중 인대 파열 부상을 당해 부상당한 상태에서 최종전까지 출전을 강행했다. 그 해 정규 시즌에서는 홈런 1개에 그쳤지만,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요미우리전에서 승리하며 홈런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 그러나 팀은 파이널 스테이지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패했다.
2012년에는 팀 주장으로 발탁되었으나, 4월 12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에서 수비 도중 큰 부상을 당하며 전력에서 이탈했다. 이후 부상에서 회복하여 1군에 복귀했지만, 8월 16일 히로시마전에서 다시 부상을 당하는 등 힘든 시즌을 보냈다.
2014년 시즌 후, 아베 신노스케의 1루수 전향을 계획하고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로 FA 이적이 결정되었다. 12월 8일 요코하마 시절 팀 동료였고, 마찬가지로 DeNA에서 FA 이적을 선언했던 가네시로 타츠히코와 함께 입단 회견을 가졌다.[36] 등번호는 2012년에 사망한 어머니의 생일에서 따온 '''23'''번을 받았다.[37] 포수로서의 FA 이적은 사상 처음이며, 두 번째 FA 이적은 구도 기미야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에 이어 역대 3번째였다. 이 보상 선수로 오쿠무라 노부유키 내야수가 요미우리에서 야쿠르트로 이적했다.[38]
3. 국가대표 경력
아테네 올림픽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출전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팀의 일원으로서 동메달을 획득했다.[46] 포수는 조지마 겐지와 2명 밖에 없었고, 불펜 포수도 선수가 겸임해야 했기 때문에 뒤에서 헌신했다. 조지마는 자신의 포수 미트에 투수진의 메시지와 사인을 모아 아이카와에게 증정했고, 아이카와는 그 미트를 보물이라고 공언하고 있다.[46]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의 일본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2012년 12월 4일에 제3회 WBC의 일본 대표 후보 선수 34명이 발표되어[47] 후보에 올랐다.[48] 2013년 2월 20일에는 제3회 WBC 일본 대표 선수 28명이 발표되어[49]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며[50][51][52], 2개 대회 만에 2번째로 선출되었다. 출정 경기인 오스트레일리아전에서는 역전 3점 홈런을 기록했고, 첫 경기인 브라질전에서는 부상당한 아베 신노스케를 대신하여 선발 출장했다.
4. 지도자 경력
2018년 산케이 스포츠 야구 평론가로 활동했다.[53] 지도자가 되기 위해 멘탈 트레이너 자격을 취득했다.[54]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1군 배터리 코치를 역임했다.[55] 요미우리 자이언츠 코치 시절 등번호는 '''79'''번이었다.[56] 2021년 5월 24일 3군 배터리 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가,[57] 같은 해 7월 19일부터 다시 1군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58] 이후 같은 해에 퇴단했다.[59]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3년 동안 수비 면에서 과제를 안고 있던 오시로 타쿠미를 훈련시켜 주전 포수로 성장시켰다.[60][61]
2021년 11월 19일, 2022년부터 친정팀인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의 배터리 코치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 발표되었다.[62] 등번호는 '''80'''번이다.[63] 2023년에는 팀의 작전적인 역할도 더해져 헤드코치급이 되어, 치프 작전 겸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64][65] 2024년에는 디펜스 치프 겸 배터리 코치가 되어, 새롭게 오펜스 치프 코치로 취임한 츠루오카 켄지로와 함께 헤드급을 맡는다.
5. 플레이 스타일
아이카와 료지는 공수 양면에서 종합적인 능력이 뛰어났으며,[66][67] 미우라 다이스케는 "당연한 것을 모두 당연하게 할 수 있는 포수"라고 평가했다. 블로킹 기술도 뛰어나 어려운 공을 놓치지 않고, 미트를 면으로 사용한다.[74]
타격에서는 센터로 돌려치는 것을 의식한 기본에 충실한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포수답게 배구를 읽고 노리는 경향이 있다.[75][76] 득점권에서 강한 타격도 특징이다.[77][78] 요코하마 시절부터 역방향 타격을 특기로 했지만, 야쿠르트 이적 후에는 코스에 따라 광각으로 타구를 쳐내는 타격도 늘어났다.[79]
젊은 시절부터 타격 평가가 높았고, 2007년에 기록한 타율 .302는 요코하마의 구단 역대 포수 중 최고 타율(규정 타석 이상)이다. 요코하마 재적 시 통산 타율 .259도 역대 주전 포수 중 최고 성적이다.[83] 1군 공식전에 출장한 19년 동안 요코하마(.259), 야쿠르트(.261), 요미우리 자이언츠(.260)에서 안정된 타율을 기록했다.
데뷔 13년 만에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시즌 종반에는 규정 타석을 채우기 위해 2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여 처음으로 3할 대 타율을 기록했다.[111]
5. 1. 수비
공수 양면에서 종합적인 능력이 뛰어났으며[66][67], 미우라 다이스케는 "당연한 것을 모두 당연하게 할 수 있는 포수"라고 평가했다. 강한 어깨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송구를 구사하며, 미트에서 공을 잡는 대신 중심을 잡아 빠르게 던지기보다는 송구의 속도와 제구력을 중요시한다.[71] 빠른 경우 2루 송구에 도달하는 시간은 1.7초대이다. 블로킹 기술도 뛰어나 어려운 공을 놓치지 않고, 미트를 면으로 사용한다.[74]5. 2. 타격
센터로 돌려치는 것을 의식한 기본에 충실한 타격 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며, 포수답게 배구를 읽고 노리는 경향이 있다.[75][76] 득점권에서 강한 타격도 특징이다.[77][78] 요코하마 시절부터 역방향 타격을 특기로 했지만, 야쿠르트 이적 후에는 코스에 따라 광각으로 타구를 쳐내는 타격도 늘어났다.[79] 속구와[80] 안쪽 공에 강하다.[81][82]젊은 시절부터 타격 평가가 높았고, 2007년에 기록한 타율 .302는 요코하마의 구단 역대 포수 중 최고 타율(규정 타석 이상)이며, 요코하마 재적 시의 통산 타율 .259도 역대 주전 포수 중 최고 성적이다.[83] 1군 공식전에 출장한 19년 동안 요코하마에서는 .259, 야쿠르트에서는 .261,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260의 타율을 기록하며, 젊은 시절부터 베테랑이 될 때까지 안정된 수치를 계속 유지했다.
개막 이후부터 손재주가 있는 타격으로 높은 타율을 유지했고 데뷔 13년 만에 처음으로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시즌 종반에는 규정 타석에 도달시키기 위해 2번 타자로 선발 출전하는 일도 있어 처음으로 3할 대의 타율을 기록했다.[111]
6. 인물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어 출전한 바 있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요코하마의 선수 회장을 3년간 맡았다.[84] 요코하마 시대에는 선수 회장, 이적한 야쿠르트에서도 주장을 맡는 등 책임감이 강하고 팀 동료들의 신뢰가 두터웠다. 젊은 선수가 많았던 야쿠르트에서는 팀의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85]
외국인 선수와는 적극적으로 영어로 소통했으며, 요코하마 시절 마크 크룬과는 아이카와가 영어로 말하면 크룬이 일본어로 대답하는 독특한 의사소통을 했다.[89] 야쿠르트 시절에는 미야모토 신야와 함께 블라디미르 발렌틴의 교육을 담당하며, 때로는 엄하게 꾸짖기도 했지만 형처럼 따랐다.[90][91]
하타케야마 제품의 포수 미트를 사용했고[92], 프로텍터, 레가드 등의 포수 보호 장비는 자낙스[93], 2006년부터 은퇴할 때까지는 모두 하타케야마 제품을 사용하며 어드바이저 계약을 맺었다.[94]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아이카와 자신도 기독교인이다.[96]
2005년에는 고향인 이치카와시의 노숙자 자립 지원을 하는 NPO 법인에 100만엔을 기부[98], 선수 시절부터 오프 시즌 크리스마스 시기가 되면 자선 행사를 개최[99], 지바현 내 아동 양육 시설에 기부하고 아이들에게 자선 물품을 전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100][101]
어린 시절에는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와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이었고, 야시키 요와 이케야마 타카히로를 동경했다.
7. 상세 정보
아이카와 료지는 요코하마 시절 선수 회장, 야쿠르트 이적 후 캡틴을 맡을 정도로 책임감이 강하고 동료들의 신뢰를 받았다.[84][85] 젊은 시절에는 과도한 책임감 때문에 스트레스로 몸 상태가 나빠지기도 했지만,[84] 야쿠르트에서는 젊은 선수들에게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85] 코치는 그의 성실한 연습 태도를 칭찬하며 젊은 선수들이 본받기를 바랐다.[85] 출전 기회가 줄어든 말년에도 벤치에서 투수들을 격려하고 후배 포수들에게 조언하는 등 경기 외적으로 팀에 기여했다.[86][87][88]
외국인 선수들과는 적극적으로 영어로 소통했다.[89] 요코하마 시절 마크 크룬과 배터리를 이뤘는데, 아이카와가 영어로 말하면 크룬이 일본어로 대답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했다.[89] 야쿠르트 시절에는 미야모토 신야와 함께 블라디미르 발렌틴의 교육을 담당하며, 때로는 엄하게 꾸짖기도 했지만 형제처럼 지냈다.[90][91]
하타케야마 제품의 약간 큰 포수 미트를 사용했고,[92] 프로텍터, 레가드 등의 포수 장비는 2005년까지 자낙스[93], 2006년부터 은퇴할 때까지 하타케야마 제품을 사용하며 어드바이저 계약을 맺었다.[94] 하타케야마 프로텍터에 사용된 비브소브(원바운드 볼의 회전을 흡수하는 회전 규제 시트)는 아이카와가 고안했다.[95]
독실한 기독교인 가정에서 자랐으며, 아이카와 자신도 기독교인이다.[96] 4형제 중 차남으로, 4살 아래의 남동생 주리 외에 2살 위의 형과 7살 아래의 남동생이 있다.[97]
2005년에는 고향 이치카와시의 노숙자 자립 지원 NPO 법인에 100만엔을 기부했고,[98] 선수 시절부터 오프 시즌 크리스마스 시기가 되면 자선 행사를 개최하여[99] 지바현 내 아동 양육 시설에 기부하고 아이들에게 자선 물품을 전달하는 활동을 한다.[100][101]
어린 시절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와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팬이었고, 야시키 요와 이케야마 타카히로를 동경했다.
7. 1. 수상 및 타이틀 경력
7. 2. 개인 기록
; 첫 기록- 첫 출장 : 1999년 8월 21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19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7회말부터 포수로서 출장[102]
- 첫 타석 : 상동, 9회초에 다카쓰 신고 앞에 유격 땅볼[103]
- 첫 안타 : 1999년 9월 3일, 대 한신 타이거스 23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8회말에 이가라시 히데키의 대타로서 출장, 기요하라 유이치로부터 1루 내야 안타[104]
- 첫 선발 출장 : 1999년 10월 14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26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7번·포수로서 선발 출장[105]
- 첫 타점 : 2000년 8월 20일, 대 한신 타이거스 1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1회말에 유후네 도시로로부터 3루 땅볼 사이에 기록[106]
- 첫 홈런 : 2001년 5월 3일, 대 야쿠르트 스왈로스 5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7회초에 이노우에 준의 대타로서 출장, 이시이 히로토시로부터 좌월 3점 홈런[107]
- 첫 도루 : 2003년 9월 19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23차전(요코하마 스타디움), 4회말에 2루 도루(투수 : 노구치 시게키, 포수 : 다니시게 모토노부)[108]
; 이정표 기록
- 통산 1000경기 출장 : 2010년 6월 2일, 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4차전(후쿠오카 Yahoo! JAPAN 돔), 7번·포수로서 선발 출장 ※역대 435번째[109]
- 1000안타 : 2013년 5월 28일,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1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9회말에 히라노 요시히사로부터 우전 안타 ※역대 272번째
- 1500경기 출장 : 2017년 8월 4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16차전(도쿄 돔), 10회초에 코바야시 세이지를 대신하여 포수로 출장 ※역대 190번째
; 기타 기록
- 1이닝 2삼진 : 2005년 4월 3일, 대 주니치 드래건스 3차전(나고야 돔) 5회초에 기록[110]
- 전 구단 상대 홈런 : 2013년 6월 5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3차전(메이지 진구 야구장), 6회말에 아오야마 코지로부터 좌월 2점 홈런 ※역대 27번째
- 올스타전 출장 : 5회(2007년, 2009년 ~ 2012년)
7. 3. 연도별 타격 성적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자 | 희생번트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99년 | 요코하마 | 8 | 8 | 8 | 1 | 2 | 0 | 0 | 0 | 2 | 0 | 0 | 0 | 0 | 0 | 0 | 0 | 0 | 1 | 0 | .250 | .250 | .250 | .500 |
2000년 | 39 | 82 | 73 | 6 | 16 | 2 | 0 | 0 | 18 | 7 | 0 | 0 | 3 | 1 | 3 | 0 | 2 | 11 | 2 | .219 | .266 | .247 | .512 | |
2001년 | 59 | 70 | 64 | 7 | 15 | 2 | 0 | 2 | 23 | 12 | 0 | 0 | 2 | 3 | 1 | 0 | 0 | 12 | 1 | .234 | .235 | .359 | .595 | |
2002년 | 73 | 184 | 174 | 16 | 39 | 6 | 0 | 1 | 48 | 12 | 0 | 1 | 1 | 1 | 6 | 3 | 2 | 34 | 5 | .224 | .257 | .276 | .533 | |
2003년 | 70 | 182 | 165 | 16 | 41 | 8 | 1 | 5 | 66 | 14 | 1 | 1 | 5 | 1 | 10 | 5 | 1 | 50 | 1 | .248 | .294 | .400 | .694 | |
2004년 | 102 | 323 | 304 | 31 | 80 | 16 | 1 | 8 | 122 | 46 | 3 | 0 | 5 | 1 | 13 | 2 | 0 | 77 | 8 | .263 | .292 | .401 | .693 | |
2005년 | 144 | 559 | 498 | 38 | 129 | 20 | 0 | 8 | 173 | 46 | 0 | 2 | 9 | 7 | 39 | 9 | 6 | 90 | 13 | .259 | .316 | .347 | .664 | |
2006년 | 119 | 438 | 388 | 36 | 95 | 19 | 0 | 6 | 132 | 39 | 2 | 1 | 9 | 7 | 29 | 10 | 5 | 83 | 11 | .245 | .301 | .340 | .641 | |
2007년 | 123 | 450 | 391 | 37 | 118 | 12 | 1 | 2 | 138 | 33 | 0 | 1 | 16 | 1 | 40 | 13 | 2 | 51 | 6 | .302 | .369 | .353 | .722 | |
2008년 | 101 | 339 | 306 | 27 | 78 | 5 | 1 | 7 | 106 | 22 | 0 | 1 | 11 | 1 | 19 | 3 | 2 | 52 | 7 | .255 | .302 | .346 | .648 | |
2009년 | 야쿠르트 | 122 | 446 | 413 | 26 | 102 | 21 | 1 | 5 | 140 | 43 | 2 | 2 | 6 | 3 | 23 | 3 | 1 | 69 | 14 | .247 | .286 | .339 | .625 |
2010년 | 120 | 474 | 427 | 44 | 125 | 17 | 2 | 11 | 179 | 65 | 2 | 0 | 6 | 7 | 30 | 4 | 4 | 70 | 8 | .293 | .340 | .419 | .759 | |
2011년 | 126 | 458 | 409 | 24 | 100 | 14 | 1 | 1 | 119 | 33 | 0 | 0 | 11 | 4 | 30 | 5 | 4 | 62 | 13 | .244 | .300 | .291 | .591 | |
2012년 | 72 | 244 | 220 | 19 | 54 | 8 | 0 | 1 | 65 | 28 | 0 | 0 | 1 | 2 | 20 | 3 | 1 | 33 | 7 | .245 | .309 | .295 | .604 | |
2013년 | 66 | 239 | 219 | 23 | 61 | 13 | 0 | 6 | 92 | 30 | 1 | 1 | 4 | 2 | 14 | 1 | 0 | 42 | 2 | .279 | .319 | .420 | .739 | |
2014년 | 58 | 207 | 192 | 19 | 48 | 8 | 0 | 2 | 62 | 21 | 0 | 0 | 2 | 2 | 9 | 1 | 2 | 31 | 5 | .250 | .288 | .323 | .611 | |
2015년 | 요미우리 | 40 | 114 | 99 | 11 | 31 | 3 | 2 | 4 | 50 | 17 | 1 | 0 | 2 | 1 | 12 | 0 | 0 | 16 | 1 | .313 | .384 | .505 | .889 |
2016년 | 37 | 48 | 41 | 2 | 10 | 2 | 0 | 0 | 12 | 4 | 0 | 0 | 0 | 1 | 6 | 1 | 0 | 10 | 0 | .244 | .333 | .293 | .626 | |
2017년 | 29 | 40 | 38 | 0 | 6 | 1 | 0 | 0 | 7 | 3 | 0 | 0 | 0 | 1 | 1 | 0 | 0 | 9 | 1 | .158 | .175 | .184 | .359 | |
통산: 19년 | 1508 | 4905 | 4429 | 383 | 1150 | 177 | 10 | 69 | 1554 | 475 | 12 | 10 | 93 | 46 | 305 | 63 | 32 | 803 | 105 | .260 | .309 | .351 | .660 |
7. 4. 연도별 수비 성적
합살
살
책
살
일
비
율
도
수
용
도
루
루
자
지
율